두 도시 이야기 홍콩편 #13 타이틀이 뭐길래
더이상 시니어 디자이너 타이틀로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다
주니어 디자이너들과의 불화
홍콩의 직장 문화는 한국이나 일본만큼 위계 서열이 확고하지 않아 직급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연차를 쌓으면서 다져온 경험치와 능력을 후임들에게 그만큼 존중받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주눅이 들기 쉬운 상사들과의 불화와는 달리 후임들과의 불화는 정말 속이 다 썩어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패션 회사에서 만난 주니어 디자이너는 자기가 친하게 지내는 동료들에게 디자인을 가져가 보여주고 확인을 받았다. 그러면서 내가 피드백을 주거나, 데드라인이 임박해 대신 일을 끝내놓기라도 할 때면 “내가 왜 너에게 디자인을 보여줘야 하냐,” “니가 뭔데 내 일을 대신 했냐”며 화를 냈고, 울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스타트업에서는 주니어 디자이너를 한 명 채용했는데,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고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면서부터 아침에는 일을 하지 않았다. 오후 두 시는 되어야 슬랙에 온라인 표시가 떴고 그 탓에 오전에 다른 팀으로부터 들어온 요청은 모두 나 혼자서 처리해야 했다. 일 년을 참다못해 그렇게 늦게 일을 시작하는 이유가 있냐고 물었더니 “우리 회사는 유연 근무인줄 알았다”며 변명을 했다.
나이를 내세워 젊은 디자이너들의 기강을 잡는 꼰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경력이 십 년이 넘게 차이가 나는 후배들이 나를 이렇게까지 막 대하고 무시하며, 떼를 쓰고 일을 내팽개치는 모습을 보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권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시니어라지만 별로 시니어가 아닌
시니어 디자이너의 Senior는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연장자라는 뜻으로 본래는 경험도 많고 능력도 검증된 디자이너에게 주어져야 하는 타이틀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학 졸업 후 2-3년의 경험을 쌓고 나서 ‘시니어’라는 직급을 다는 경우가 흔했다.
처음 홍콩에서 이직 제안을 받았을때 ‘시니어 UX 아키텍트’라는 타이틀을 받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아직 일본을 제외한 해외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 ‘시니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막연하게 높은 직급일 것이라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시니어 UX’라는 직급을 달고 홍콩의 에이전시에 입사하자 ‘UX 리드’가 나의 상사가 되었다. 보아하니 시니어 UX는 주로 뒤에서 와이어프레임을 그리는 등의 실무를 했고, 리드가 클라이언트와 소통하며 디자인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다. 시니어 위에는 리드, 리드 위에는 회사에 따라 다르지만 프린시플, 매니저, 헤드, 디렉터, VP 등의 직급이 촘촘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클라이언트와 밀접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에이전시에서 이러한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실무 능력보다는 말을 당당하고 유창하게 하는 능력이 높게 평가되었고, 나와 달리 자신을 세일즈하는 데 능한 팀원들이 쭉쭉 승진하는 것을 보면서 박탈감을 느끼는 일도 많았다.
홍콩에 와서 ‘시니어’ 타이틀을 가진 것은 좋았지만, 거기서 벗어나 한 단계 위로 스텝업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에이전시와 패션 회사는 승진의 기회를 얻기 전에 퇴사하게 되었고, 4년을 머물렀던 스타트업은 인종차별적인 인사 발탁을 거듭하며 나와 같은 홍콩 오피스의 실무진에게는 승진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링크드인을 보면 이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 까마득한 후배들, 심지어 누가 봐도 전혀 일머리가 없었던 사람들조차 리드로 디렉터로, 제너럴 매니저, 또는 APAC 헤드 등으로 승진해 쟁쟁한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타이틀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일만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했지만, 일만 잘 한다고 해서 남들이 저절로 나를 인정해 줄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지극히 나이브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인간은 편견의 산물이며, 같은 말을 해도 타이틀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이 전혀 다른 것이 현실이었다.
리드직을 노려보자
4년간 비즈니스의 확장에 크게 기여했으나 결국 인종차별주의자인 인사부장과 부딪혀 말도 안되는 멸시를 당하고 나서, 나는 크게 화가 나 있었고 더이상 이런 취급을 참을 수 없다고 느꼈다. 내가 매니저였어도, 디렉터였어도 이렇게 대했을까? 분명히 아니었을 것이다.
지난 15년간 경력을 쌓으면서 경험과 능력치는 차곡차곡 레벨업 해 왔기에, 돌아보면 큰 후회가 남지는 않았다. 연봉 역시 착실히 조금씩 올리는 데 성공해 꽤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딱 하나 잘못한 것은 승진에 소홀했던 것이었다.
이를 뼈저리게 깨달은 나는 이직을 결심하며, 절대로 또 다른 ‘시니어’ 직으로는 옮겨가지 않겠다는 원칙을 정했다. 무조건 한 단계 직급을 올려 리드 이상의 오퍼만 받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간 시니어직에 묶여 있던 탓에, 리쿠르터들은 계속해서 다른 시니어 포지션만 추천해 왔다. ‘회사에 따라 직급의 구조는 많이 다릅니다. 이 회사의 시니어 포지션은 사실 진짜 높은 직급이에요.’ 라는 것은 그들의 단골 멘트였다. 나는 더이상 속지 않았다.
심지어는 어떤 회사의 리드 포지션이 나와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 지원을 했더니, 인사에게 연락이 와서 ‘시니어 포지션을 제안하고 싶어요’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리드 포지션은 어디 가고 제게 시니어 포지션을 가져오시나요? 제가 우스운가요?’ 하는 생각이 들었고, 망설임 없이 딱 잘라 거절했다.
링크드인에 ‘UX Lead’로 검색해 홍콩의 모든 구인을 찾아보는 것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에이전시의 UX Lead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다.
이름을 들어 본 적은 없는 회사였지만,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많은 쟁쟁한 클라이언트의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에 더해, 메타버스나 NFT, AR과 같은 신기술 개발에도 적극 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재미있는 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