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는 일도 해 보아야 하는 이유
시끌벅적 정신 없었던 마케팅 에이전시 시절
두 도시 이야기 홍콩편 #5
*1편부터 4편까지의 링크는 이 뉴스레터 하단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U 없는 UX 디자이너
나는 차차 홍콩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직장 생활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파견된 사람들과, 영어권 국가에서 나고 자란 엑스팻들, 돌아온 이민 2세들, 그리고 홍콩 로컬들 사이에서 나는 붕 뜨는 존재였지만 씩씩하게 내 몫을 해 나갔다.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이 아니다보니 점심시간에도 늘 혼자였지만, 혼자이면 혼자인대로 주변을 열심히 탐색하며 맛집을 찾아다녔다. 나는 외로워서 외국 생활을 못 하는 타입은 절대 아니었다.
9시 반에 출근해서 6시 반까지 정신없이 일했다. 업무량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업무 시간 내에는 온전히 집중해서 일을 했다. 비좁은 오피스에서 와글대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에 시달렸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였지만 항상 기운이 없어서 버스나 택시를 타고 다녔다. 늘상 피곤했다.
내가 다니게 된 회사가 마케팅 에이전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UX 디자이너인 내게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히 깨닫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다녔던 회사들처럼 개발이 중심이 아니라 마케팅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캠페인 일이 많았다. 처음에 맡게 된 프로젝트도 호텔 체인의 캠페인이었는데, 인플루언서 콘텐츠를 이용해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미니 사이트를 만드는 일이었다.
캠페인 사이트 제작은 처음 해 보는 일이라 배울 점도 많았고 재미도 있었지만, 내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추구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UX, 즉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택시가 잡히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을 위해 우버가 생겨났고, 호텔 숙박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에어비앤비가 생겨났듯이 말이다. 하지만 캠페인은 주로 브랜드 인지도나 방문자 수, 매출 등을 높이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사람들의 삶을 낫게 하는 것이 우선 순위가 아니다. 캠페인 일을 거듭 하면서 나는 너무 사용자 측에서 멀어져 기업 측의 이해만 대변하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기업이 주는 돈으로 월급을 받고 있으므로 기업의 입장은 무시하고 사용자만 바라보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UX 디자인이라는 것은 기업의 니즈를 살피되, 사용자를 중심으로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다. 사용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좋은 프로덕트를 만들고, 프로덕트가 훌륭하기 때문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 사용해주면, 그 결과 매출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 순서를 반대로 접근한다면 UX 디자인 프로세스라 부를 수 없다. UX의 U는 User, 즉 사용자를 뜻하는 것인데 UX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달고도 사용자를 살필 수 없으니 답답한 기분이 쌓여갔다.
또한 오래도록 쓰이는 프로덕트가 아닌 한 철 쓰이고 마는 캠페인 사이트 제작을 하면 할수록 이 캠페인을 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인가? 나는 기업의 확성기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닌가? 쓰고 버리는 디지털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도 생겨났다.
캠페인을 할 때 하더라도, 사용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현재 어떤 문제 의식을 가지고 캠페인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인지, 밑조사가 충분하지 못하고 납득할 수 있는 근거가 확실하지 못하면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예를 들어 클라이언트가 백만 달러를 들고 와서 필요없는 웹사이트를 만들어달라고 했을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 예산을 덥썩 받아 아무도 쓰지 않는 디지털 쓰레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 어떤 문제가 있으며 그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지부터 컨설팅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예뻐야 돼,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캠페인 이외에도 다양한 프로젝트가 있었다. 가장 수요가 많았던 것은 ‘리뱀프(Revamp)’ 즉 웹사이트의 디자인을 새로 제작하는 일이었다.
2010년 이후에는 화면의 폭을 풀로 사용하면서 쭉쭉 스크롤하면서 읽기 쉽도록 시원시원하게 큼직한 이미지와 카피를 배치하는 것이 표준적인 디자인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만들어진 웹사이트는 좁은 레이아웃에 빽빽한 글씨, 낮은 해상도의 작은 이미지 사용과 같은 특징이 있었고 그런 디자인은 한눈에도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풍겼다. 시간이 흐르고 웹디자인의 유행이 변하면서, 기업들도 그에 발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금세 방문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우리는 캐세이 퍼시픽의 다양한 디지털 프로덕트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중이었다. 그 중에서도 공항 카운터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 없이 웹사이트에서 탑승 체크인을 마칠 수 있는 ‘온라인 체크인’ 기능의 디자인을 내가 맡게 되었다. 나는 총 8주간 온라인 체크인의 각종 기능을 매주 하나씩 정복해나갔다. 이번 주는 메인 페이지 디자인, 다음 주는 여행자 정보 입력 절차 디자인, 그 다음 주는 좌석 선택과 기내식 선택 디자인, 과 같은 식이었다. 매주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이 쏟아졌고 수정을 하면서 다음 아이템을 디자인해야 하는 바쁜 일정이었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문제에 부딪혔다. 하나는 나의 직속 상사였던 UX 리드의 일하는 방식이 나와 맞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항상 머릿속에 정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아이디어를 스케치해서 가져가면 ‘그것은 틀렸다’면서 ‘이게 맞다’면서 나의 해결책을 오답처리했지만, 그 이유를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데이터가 뒷받침해주는 것도 아니고, 유저가 피드백을 준 것도 아닌데, 그의 아이디어는 ‘맞고’ 내 디자인은 ‘틀린’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진정한 사용자 중심 설계에 대한 갈증이 심해졌다.
또 하나는 내가 하는 일이 디자인을 예쁘게 고치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데이터를 서버에서 가져오는데 20초의 시간이 걸린다면, 디자인이 아무리 예뻐도 사용자들은 신경질을 내면서 창을 닫아버릴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디자인과 함께 시스템의 개선도 이루어져야하는데, 클라이언트는 이런 부분은 뒷전이었다. 시스템은 우리 소관이 아니며 손을 댈 수 없으니 그저 껍데기만 예쁘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뭐든 한다면 잘 하고 싶었다. 껍데기만 예쁘게 만드는 일은 성에 차지 않았다. 껍데기도 예뻐야 되지만, 그보다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불편없이 제공해줄 수 있는 친절하고도 자연스러운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나아가 프로덕트와 서비스를 통해서 사람들과 감정적인 연대를 형성하고 싶었다. 나는 시키는 일만 하면서 월급만 딱딱 받으면 그만인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쁨과 보람을 주었던 일
다양한 프로젝트 중에서 내가 가장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최적화(Optimization)’ 관련 일이었다. 이미 론치를 마치고 운영 중인 사이트를 대상으로 어떻게 하면 사용자 경험을 개선하여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분석해서 리포팅하는 일이었다.
호주 오피스에서 의류 온라인 스토어의 최적화를 의뢰해 온 적이 있었다. 먼저 데이터 분석가가 구글 애널리틱스를 보여주며 현 상황을 내게 설명해 주었고, 내가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UI/UX 개선을 위한 가설을 제시했다.
예를 들면, 제품 상세 페이지에서 구입 페이지로 넘어가는 비율이 낮으므로, 장바구니에 넣기 버튼을 더 눈에 띄는 곳에 배치해야 한다던가, 배송비와 배송 기간 등 중요한 정보를 잘 보이는 곳에 표시해야 한다는 등의 아이디어를 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임팩트가 클 것 같은 시책을 몇 가지 골라 A/B 테스팅을 실시하고, 나의 가설이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면 최종적으로 디자인에 반영했다.
최적화 역시 근본적인 프로덕트의 존재 의의를 생각하는 일은 아니라, 그저 여기저기를 살짝 고쳐 실적을 개선하기 위한 일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근거도 없이 클라이언트와 팀원들이 시키는 대로 디자인을 찍어내는 일보다는, 데이터에 기반해 가설을 제시하고, 검증을 통해 최종 반영에 이르는 과학적인 프로세스가 훨씬 편하게 느껴졌다.
또 사용자에게 좋은 디자인을 제공해서 불편 없이 구매에 이르도록 돕고, 그 결과 기업의 매출 증대를 이끌어내는 흐름도 마음에 들었다. 나의 개선책으로 인해 짜증이 조금이나마 덜어진 사람이 분명히 세상에 몇 명 쯤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최적화 프로젝트는 적어도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납득할 수 있었다.
나는 최적화 일을 꽤나 잘했다. 내가 보아도 나의 보고서는 논리적이고 실행 가능한 인사이트를 제공하고 있었다. 의류 온라인 스토어 최적화 프로젝트의 오너였던 호주 오피스의 매니저는 협업 이후에 팀원들에게 이런 이메일을 보내왔다.
It’s clear that Soyeon has a terrific understanding of UX principles which is great, and what I would have expected from the work. She has really gone above and beyond.
소연이 이 일에 필요한 UX 원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기대를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주었어요.
내가 일을 잘 하고 있다는 자각, 그로 인해 남들에게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일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과 보람 중의 하나이다. 나는 지금도 자신감이 떨어져 의기소침할 때면 그 때 그 이메일을 꺼내 다시 읽는다. 그리고 나면, ‘맞아, 나는 이렇게 일을 잘 하는 멋진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들며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사는 게 별 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맛으로 사는 것 같다.
일년 반 동안 이 마케팅 에이전시에서 일하면서 힘든 일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여기를 거쳐간 것을 후회하거나, 쓸데없이 시간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원하는 않았던 일을 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내가 왜 이 일을 좋아할 수 없는지 경험을 통해 생생하게 깨달을 수 있었고, 그 이유를 말로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철학과 어긋난 일도 해 보고 나서야, 나에게 진짜 맞는 일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일에서 정말로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나는 어떤 일을 하며 어떤 프로덕트를 만들고,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돕고 싶은지, 어떤 동료로 기억되고 싶은지, 흐릿하기만 했던 생각이 차차 정리되어 갔다. 이것저것 욕심만 많았던 UX 디자이너에서, 중심이 잘 잡힌 UX 디자이너로 거듭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두 도시 이야기 홍콩편
멤버를 위한 쿠키🍪




재택근무의 시대는 가고, 저는 거의 풀오피스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바쁜데 저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생사가 걸린 문제가 아니면 말 걸지 마시오’라고 적어 붙여놓았습니다.
풀오피스 근무 전환으로 인해 고양이는 살짝 서운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회사와 집이 가까워 점심시간에 들어와서 돌봐주고 있어요.
건강한 아침 식사가 요새 제 관심사입니다. 사과가 가장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금세 카페인 투여를 하고 맙니다. 카페인과 설탕 줄이기, 영원한 저의 과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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