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홍콩편 #8 문화가 있는 도시
홍콩에서 다채로운 예술적 영감을 충전하는 방법
내게 꼭 필요한 것
“앞으로 또 다른 곳에서도 살아볼 계획이 있어?”
한국과 일본을 거쳐 홍콩에서 살고 있다 보니 이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내 답변은 “그렇다”이지만 “앞으로 5년 정도는 홍콩에 머무를 것 같다”라는 조건을 덧붙인다. 현재 홍콩에서 생활하는 데 불편한 점이 없고, 커리어와 자산을 쌓아올리기 무척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고 나면, 또 자유롭게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목적지는 어디가 될 것인가? 많은 아이디어가 있지만 마음을 정하지는 못했다. UX 관련 구인이 많은 영국에 가서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 동생이 살고 있는 캐나다에서 일을 하다가 기회를 봐서 미국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도 있다. 실리콘 밸리에서 한번쯤은 일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동경하는 뉴욕에서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 상하이나 싱가포르도 일이 년 정도 살아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고, 대만에서 슬로우 라이프를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다.
어디로 가든 내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문화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영화관이 있다면 좋겠다. 휴일에는 미술관과 박물관 투어를 할 수 있다면 좋겠고, 교향악단과 발레단이 있는 도시라면 더 좋겠다. 곳곳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건축물들이 있고, 연극과 뮤지컬을 도처에서 공연하며, 매년 락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이면 좋겠다. 문화는 마치 공기 중의 산소만큼이나 내게는 꼭 필요한 요소이다.
문화 발전을 위한 홍콩 정부의 노력
영국 식민지 시절 어떤 영국인 총독은 홍콩이 런던과 뉴욕과는 달리, 돈만 흐르고 있을 뿐 문화가 없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홍콩을 식민 지배하며 편리한 대로 이용해 놓고 “여기에는 문화가 없다”며 한탄하다니. 제국주의자들의 오만한 사고방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나는 이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한다. 홍콩에서는 분명히 문화가 있다. 고기잡이 배가 드나들던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시절부터, 중개 무역의 거점으로 또 나아가 눈부신 금융 도시로 성장하면서 차곡차곡 쌓아온 문화 유산이 있다. 또한 아시아의 그 어떤 지역보다도 빠르게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다양성을 수용하며 구축한 메트로폴리탄으로서의 정체성이 있다.
1995년에 홍콩 정부는 홍콩 예술 발전국(HKADC)을 설치하고 문학, 공연, 시각 및 영화 예술의 발전과 교육을 폭넓게 계획, 홍보하고 지원하여, 홍콩을 아시아의 문화 허브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정부는 매년 거액의 예산을 할당하여 다양한 예술을 지원해 왔고, 21세기가 되자 그 노력은 차차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현재 아트 바젤의 전신이 된 아트 페어가 시작되었고, 홍콩은 세계적인 아트 거래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각지에 크고 작은 갤러리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3월만 되면 아트 바젤, 아트 센트럴 등의 다양한 아트 관련 행사가 열린다. 수 년 전부터는 빅토리아 하버에 둥둥 뜬 거대한 아트 조형물을 보며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는 것이 3월의 풍속도가 되었다.
구룡역 근처에는 정부가 계획적으로 조성한 West Kowloon Culture District (서구문화구)라는 지역이 있다. 이곳엔 현대미술관인 M+, 홍콩 고궁 문화 박물관, 중국 오페라 공연 센터 등 문화 시설이 모여 있으며, 재즈 페스티벌, 락 페스티벌을 비롯한 각종 공연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또 ‘아트 파크’에서는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 앉아 멋진 홍콩의 빌딩숲을 구경할 수도 있어 날씨가 좋은 날이면 돗자리를 깔고 소풍을 즐기는 시민들을 볼 수 있다.
나의 문화 생활
가끔가다 아침에 출근하려다 보면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억지로 회사로 향하지 않고, 하루 쉬어 주는 것이 번아웃을 막는 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한산한 평일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영화관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한 편 보는 것이 내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전이다.
야우마테이의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는 내가 특히 좋아하는 영화관이다. 멀티플렉스와는 다른 미니시어터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고, 다른 영화관에서는 보기 힘든 마이너한 예술 영화를 다수 상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시설 내에 서점 겸 식당인 ‘큐브릭 카페’가 입점해 있어 영화 포스터나 굿즈등을 구경하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예술적 영감을 충전할 때가 되었다 싶으면 센트럴의 미드레벨로 향한다. 미드레벨에는 수많은 갤러리가 있어 산책을 하면서 한번씩 들어가 구경하기 좋다. 또한 근래 미드레벨에는 특색있는 벽화가 많아졌다. 보통 건물주가 아티스트에게 커미션을 주는데, 잡화점 G.O.D 앞의 구룡 성채 벽화처럼, 그림이 유명해져 인스타그램 성지가 되는 경우도 있다. 많은 스트리트 아트를 구경하며 셩완까지 걸어가, 옛 경찰 기숙사 건물이었던 PMQ를 둘러본 후 돌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나의 창의력 충전 코스이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면 홍콩 발레단의 프로그램을 확인한다.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하며 한 해를 마치는 것이 나의 연례 행사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형들의 춤을 선보이는 발레 공연 역시 재미있지만 그보다도 오케스트라가 무대 아래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생으로 듣고 볼 수 있어 좋다. 침사추이의 홍콩 문화센터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페리를 타고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홍콩섬으로 돌아오며, 한 해를 회고한다.
2021년 마지막 순간에는 새해를 맞이하러 홍콩 교향악단의 클래식 연주를 보러 갔었다. 조그만 북소리로 시작해서, 관악기들이 번갈아 가며 메인 테마를 노래하는 ‘볼레로’ 연주를 직접 보니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악기가 합세해 쩌렁쩌렁 울리는 마지막 순간에는 살아있길 잘 했다고 느낄 정도였다.
타지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외롭거나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삶에 치여 지치고 피로한 날도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듣고 즐기면서, 다시 숨을 가다듬고 자신을 추스릴 수 있었다. 홍콩은 문화를 사랑하는 나의 영혼을 부족하지 않게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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