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홍콩편 #6 패션 회사의 UX 업무란
갈고 닦아왔던 리서치 지식과 기술을 드디어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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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같은 세 달의 휴식
홍콩에 와서 처음으로 일했던 마케팅 에이전시에서 1년 5개월을 일한 뒤, 2017년 1월에 회사를 떠났다. 캐세이 퍼시픽의 일을 진행하며 한창 사기가 드높았던 것도 지난 일이 되어 에이전시를 떠나는 사람들도 드문드문 생겨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직속 상사는 조금 아쉬워하는 듯 했지만, 하고 싶은 리서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납득해 주었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나는 이미 이직 활동을 마치고 오퍼를 받아두고 있었다. 홍콩과 중국에 화려한 매장을 두고 고급 브랜드품을 판매하는 회사로, 200년의 역사가 있다고 했다. 인터넷의 시대 이전의 홍콩에서는 이 회사를 거치지 않으면 해외의 유명 브랜드품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고 하니, 한국의 ‘현대백화점’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오프라인 매장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물건을 잘 팔기만 하면 되었던 시대는 지나고, 이커머스와 소셜 미디어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이 회사 역시 오프라인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에 한계를 느끼고 O2O (온라인 투 오프라인) 모델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소비자 경험 전문가들을 채용하고 있었고, 나의 리서치 스킬을 높게 평가해 주어 시니어 경험 디자이너 포지션의 오퍼를 주었다.
예산 문제가 얽혀 입사를 4월에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나는 선뜻 받아들였다. 안그래도 마케팅 에이전시 생활이 고되어 번아웃이 가까웠던 차였다. 걱정 없이 푹 쉴 수 있는 세 달의 휴식. 직장인에게 쉽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닌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 매일을 음미하며 즐겼다. 고양이들과 함께 실컷 자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카페에 가서 케익을 먹었다. 꿈결같은 시간이었다.
힙한 동네 웡척항
이 패션 회사는 홍콩섬 남단의 웡척항이라는 곳에 위치해 있어 도심에서는 꽤나 거리가 있었다. 코즈웨이베이에서 버스를 타면 긴 터널을 가로질러야 했고, 애드미럴티에서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하철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출퇴근길에 창밖으로는 오션 파크가 보였고 회사는 낡은 공업 빌딩이 늘어선 거리에 유일하게 유리로 번쩍거리는 새 빌딩에 위치해있었다.
웡척항에는 도심만큼은 아니지만 코워킹 스페이스나 스타트업, 카페나 갤러리 등이 많아 힙한 외곽 지역이 주는 자유롭고 예술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낡은 건물의 벽에는 심심치 않게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었고 큰 규모의 창고와 공업 빌딩이 많아 마치 브루클린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 면접을 보기 위해서 이 회사를 찾았을 때, 곧 상사가 될 UX 매니저가 빌딩 안을 구경시켜주었다. 널찍널찍한 공간에 인더스트리얼 스타일로 인테리어가 되어 있었고, 요가룸과 낮잠실까지 갖추고 있어 정말 멋진 일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심의 복작복작함에 지쳐있던 나에게는 이렇게 공간을 넓게 쓰는 오피스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패션 회사의 인하우스 UX 업무란
내가 일하게 된 팀은 탁월한 소비자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전략, 데이터, 디자인 등의 다양한 부서가 하나로 합쳐진 새로운 조직이었다. 부서는 프랑스인 남성 VP인 크리스토프가 총괄하고 있었고, 그 안에 작은 UX 팀이 있어 몰리라는 백인 여성이 매니징을 하고 있었다. UX팀은 총 네 명으로, 몰리와 나, 그리고 다른 두 명의 주니어 디자이너로 구성되어 있었다.
의사 결정 과정을 보면 꽤나 탑다운 조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 사분기가 시작되면 크리스토프가 모두를 불러 모아놓고 몇 가지 중점 영역을 공유했고, 그 구상에 따라 관련 프로젝트를 론치해 담당자를 정했다. 각 사분기마다 서너개의 프로젝트를 병행해서 진행했는데, 가장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UX 프로젝트로는 럭셔리 제품 소비자들의 인식 조사 활동이 있었다.
면접 때에도 몰리가 이 조사 활동을 언급하며 나의 리서치 스킬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입사 후에는 내가 이 프로젝트를 주도해서 이끌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입사해보니 실제로는 외부의 리서치 에이전시에 이 활동을 거의 맡겨두고 있었고 우리는 방향만 잡아주는 듯 했다. 또 크리스토프와 몰리의 요구 사항이 많아 일개 시니어 UX 디자이너인 내가 참견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보아하니 럭셔리 제품 구매에 큰 돈을 쓰는 다양한 소비자들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고, 같이 쇼핑을 하거나, 자택을 방문해 옷장을 살펴보는 등 인류학적이며 맥락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듯했다. 리서치에 큰 열정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이 프로젝트에서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클라이언트라며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는 것은 성에 차지 않았다.
나한테 시켜주면 잘 할 수 있는데, 굳이 거금을 들여가며 외주를 주고 있다니! 리서치를 하고 싶어서 에이전시를 나와서 인하우스에 왔더니, 중요한 프로젝트를 죄다 에이전시에 맡기고 있다는 사실이 실망스럽게 느껴졌다.
매장 스탭의 문제 해결하기
럭셔리 제품 고객의 행동과 심리를 파헤치는 대대적인 조사 프로젝트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다른 프로젝트에서 본격적으로 리서치를 실시할 기회가 있었다. 두 가지 프로젝트가 특히 기억에 남았는데, 하나는 매장에서 일하는 ‘퍼스널 스타일리스트’들을 위한 앱을 개발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매장 내에 입점해 있는 화장품 브랜드들의 재고 관리를 효율화하는 일이었다.
퍼스널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은 매장에서 고객의 쇼핑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데, 주로 VIP 등 자주 매장을 방문하는 고객들과 평소에 긴밀히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했다. 신상품이 나오거나, 세일이 시작되면 위챗이나 왓츠앱 등의 메신저로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고객들에게 그 소식을 알리거나 온라인 스토어의 링크를 공유해 구매로 이어지면 일정 액수의 커미션을 받는다고 했다.
직접 매장으로 나가 많은 퍼스널 스타일리스트와 인터뷰를 해 보니, 커미션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링크를 생성해주는 앱에 버그가 너무 많고 사용성이 떨어져 불편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또 스탭으로서 깔아야 하는 앱이 너무 많아 항시 이 앱 저 앱을 옮겨다녀야 하고, 각기 다른 로그인 정보를 관리해야 해서 번거롭다는 의견도 많았다. 또 오프라인 매장에서 고객이 원하는 사이즈와 색상의 재고가 없을 경우에, 스탭이 대신 온라인으로 주문을 해 상품을 자택으로 배송하고, 계산은 매장에서 마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낡은 앱의 서비스를 스탭이라면 모두가 사용하는 포스(Point Of Sales, 판매시점 정보관리) 앱에 통합하기로 했다. 또 오프라인 매장에서 온라인 주문을 하거나, 온라인 구입품을 오프라인에서 반송할 수 있도록 다양한 연계 기능을 추가해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그 디자인 프로토타입을 가지고 다시 스탭들을 만나 사용성 테스트를 실시했고, 결과 우리가 만든 솔루션이 효과가 있다는 검증까지 마칠 수 있었다.
UX일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유저 인터뷰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시작해, 아이디어 만들기, 프로토타입 제작, 유저 테스트에 이르기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리서치 프로세스를 계획하고 주도할 수 있었다. 지금껏 책을 읽고 트레이닝을 받으며 머리로만 알고 있던 리서치 지식을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패션 회사 이야기 어떠셨나요! 이어지는 이슈에서는 패션 회사 이야기 그 두번째, 매장 내 입점해 있던 화장품 브랜드들의 재고 관리를 효율화 하는 일, 그리고 이 회사에서 경험한 문제점들과 한계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두 도시 이야기 홍콩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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