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홍콩편 #9 스타트업 이직 성공
전자상거래 관련 스타트업에서 UI/UX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하다
내게 맞는 스타트업을 찾아
패션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또 다음 직장을 찾고 있었다. 관료주의, 무능력, 가십과 정치질이 난무하는 사내 문화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미 이직 경험을 쌓을 대로 쌓았기에 더이상 새로운 도전이 두렵지 않았고, 이번에도 이직을 통해 더 나은 직장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지금껏 대기업과 에이전시에서 경력을 쌓으면서 막연하게 스타트업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타트업의 일원으로 일해 본 경험은 없었지만, 대기업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상품화하는 프로젝트를 맡아보기도 했고, 에이전시에서 스타트업을 클라이언트로 맞아 협업을 한 적도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제로 상태에서 시작해서, 상품을 개발하고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일이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언젠가는 본격적으로 스타트업의 일을 해 보고 싶었다.
링크드인 등 취업 사이트에서 마음에 드는 스타트업을 발견하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홍콩에는 많은 스타트업이 있었지만 내가 일해보고 싶은 회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떤 애니메이션 제작 스타트업에서는 백인 남성 디렉터가 자꾸만 내 연봉이 비싸다는 말만 반복했다. 교육 관련 스타트업에 갔더니 이번에도 백인 남성 프로젝트 매니저가 나와 내 작업물을 그야말로 해부하는 수준으로 검사하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신경질을 냈다. 이미 패션 회사에서 크리스토프의 오만한 태도에 진저리가 나 있었다. 이런 매니저들과는 절대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링크드인에서 어떤 리쿠르터에게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미국에 본거지를 둔 스타트업의 홍콩 오피스에서 디자이너를 채용 중이라고 했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가능하고 아시아 소비자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 또 럭셔리 패션 업계에서의 경험이 있는 사람을 뽑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나를 위한 맞춤 구인 공고 같았다. 나는 흔쾌히 관심이 있다는 답장을 보냈다.
작지만 글로벌한 회사
이 회사에 대해서 더 알아보니 창업자는 두 명으로, 한 명은 마케팅 경험이 풍부한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었고, 또 한 명은 세일즈에 능한 캐나다인 남성이었다. 이 둘이 의기투합해서 패션 브랜드의 전자상거래 사업을 더욱 글로벌하게 확장할 수 있도록 돕는 스타트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자금은 영국의 엔젤투자자가 제공하고 있었고 머지않아 벤처 캐피털에서도 지원을 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이 회사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오피스와 사원들이 전세계에 흩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총 30명 가량의 작은 회사였지만 미국, 캐나다, 영국, 루마니아, 홍콩에 본거지가 있었고 필연적으로 슬랙 등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툴을 활용하며 협업하고 있었다. 이러한 업무 방식은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시대에는 보편화되었지만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고, 매일 오피스로 출퇴근하는 삶에 지쳐 있던 내게는 이러한 조직 구성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홍콩 오피스는 완차이의 코워킹 스페이스의 작은 한 칸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케터와 고객 서비스 팀을 합쳐 겨우 대여섯명이 상주하고 있었고, 내가 긴밀하게 일해야 하는 디자인 팀은 영국에 있어 오후에만 커뮤니케이션을 하면 될 것 같았다. 코어 비즈니스 팀은 미국에 있는 바람에 간간히 밤늦게 미팅을 해야 하는 일도 있다고 했지만, 집에서 일해도 된다면 큰 문제는 아니었다.
특히 나는 직속 상사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이전 회사에서는 직속 상사의 바로 맞은 편에 앉아 끊임없이 눈이 마주치곤 했기에 종일 피로했기 때문이었다. 좁은 오피스에서 수많은 사원들이 복작복작대는 일반적인 홍콩 회사에서 벗어나, 이렇게 한산한 오피스에서라면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완차이 라이프의 시작
미국, 영국에 있는 사원들과 온라인 면접을 보고 홍콩 오피스로도 몇 번 발걸음을 한 이후에 순조롭게 오퍼를 받을 수 있었다. 타이틀은 시니어 UI/UX 디자이너로 이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연봉을 10% 정도 올려받을 수 있었고, 한 달 분의 보너스까지 받을 수 있는 좋은 내용으로 계약을 마쳤다.
또 한 가지 좋았던 점은 근무 시간이 한 시간 짧아진 것이었다. 지금까지 일해왔던 일본이나 홍콩의 회사는 하루 8시간 근무제라고 해도 점심시간을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에 실질 9시간 오피스에 있어야 했다. 직전에 일했던 패션 회사의 경우에는 9시 반에 출근해, 6시 반에 퇴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미국 회사이다 보니 점심시간을 포함하지 않고 하루에 8시간만 근무하면 되었다.
미국에서 평범한 사무직을 일컬어 “9 to 5”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그게 진짜구나 하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 늦게 시작하고 늦게 마치는 “10 to 6”으로, 하루 근무시간이 한 시간 줄어든 것만으로도 크게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아침이 여유로워졌다.
완차이 지역에는 유명한 스페셜티 커피샵과 브런치 가게, 베이커리가 많았다. 그래서 아침마다 오늘은 어떤 맛있는 커피를 마실지 고민하는 재미가 있었다. 또 영국 식민지 시절의 정취가 강하게 남아있는 펍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런 펍들은 저녁에는 피시앤 칩스나 맥주를 팔았지만, 점심에는 정갈한 식사를 저렴한 가격에 제공해 좋았다. 북경 요리, 타이 요리, 한국 요리 등등, 먹고 싶은 음식은 뭐든지 다 있었고, 미슐랭 레스토랑 역시 다수 위치해 있었다. 나는 신나게 거리 구석구석을 누비며, 완차이 지역에 점차 친숙해졌다.
스타트업의 성공을 위해 뛰기
비록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업무 내용은 익숙했다. 이 회사는 사업을 아직 본격적으로 론칭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럭셔리 패션 브랜드를 클라이언트로 맞아 처음으로 막 일본 웹사이트를 오픈한 참이었다. 나는 UX 디자이너답게 홈페이지부터 시작해서 상품 리스트 페이지, 상품 상세 페이지, 체크아웃에 이르기까지 사용성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많은 기업, 많은 사람들이 하는 착각 중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으면 알아서 팔릴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모든 서비스와 상품이 자신을 보아달라며 사람들의 주의를 뺏고 빼앗는 시대에,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이 회사 사람들도 비슷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이런 대단한 브랜드의 웹사이트를 론칭했는데, 왜 아무도 여기서 물건을 사지 않지? 혹시 결제 시 오류가 있는 건 아닐까? UX의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같은 질문을 내게 쏟아내었다.
하지만 UX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회사에서 얻게 된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전자상거래의 UX라는 것은 표준화되어있어 큰 차별화를 도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대개 소셜 미디어나 검색 엔진에서 좋아 보이는 상품이나 프로모션을 발견하고 홈페이지로 와서, 이리저리 물건을 훑어보다가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를 마친다. 이 과정에서 UI/UX는 물흐르듯이 고객을 돕기만 하면 된다.
전자상거래의 성공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머천다이징이다. 인기의 샤넬백을 90% 할인해서 판매하는 온라인 스토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사람들은 아무리 UI/UX가 열악하더라도 몰려와서 재고를 동내버릴 것이다. 좋은 상품을 갖추고 좋은 가격에 제공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그만큼 맹점이 되기도 쉽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프로모션과 컨텐츠 개발 등의 마케팅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눈에 띄어야 사람들이 찾아오고, 알려져야 비즈니스의 기반을 다질 수 있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고객 서비스이다. 고객들의 불편을 해소하는 것 뿐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 파악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실현해내야 한다. 고객들이 원하는 서비스의 표준은 업계의 치열한 경쟁과 함께 점점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아시아에서는 당일 배송, 익일 배송은 당연한 서비스로 자리잡았고 배송이 이틀 이상 걸리면 문의가 쏟아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의지만으로는 부족하고 제대로 된 투자가 필요하다. 아마존이 이상적인 고객 서비스 실현을 위해서 투자를 거듭한 결과, 한참을 적자 기업으로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전자상거래에서 UI/UX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않았기 때문에, 나는 곧 마케팅 컨텐츠 제작을 돕거나, 론치할 웹사이트의 한국어 일본어를 체크하고, 고객들의 의견을 수집해 디자인으로 문제를 개선할 수 없는지 고민해보는 등, 스타트업의 성공을 위해서 모든 방면에서 공헌하기 시작했다.
나는 초기 멤버였기 때문에 얼마간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내 힘을 보태서 사업을 크게 키워, 성공적인 엑싯을 해내고 싶다는 동기를 크게 불러일으켜주었다.
두 도시 이야기 홍콩편
멤버를 위한 쿠키🍪
작년 이맘때쯤 연말의 마지막의 정말 마지막까지 일을 하면서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년부터 12월은 일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들떠있고 어수선한 연말, 마지막까지 일을 붙잡고 있는 것이 너무 서글프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그 다짐은 3분의 1만 실현할 수 있게 되었네요. 이번 12월에는 몰아치듯 다수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도저히 쉴 수가 없었고, 겨우 21일부터 휴가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푹 쉬고, 책도 많이 읽고, 좋아하는 스케이트를 실컷 탈 예정입니다.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또 뉴스레터를 통해 알려드릴게요.
홍콩의 연말 사진을 공유하며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도 메리 크리스마스 & 좋은 연말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