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이야기 실전편 (3) 가장 중요한 이야기
제게 거는 기대는 알겠습니다. 이제 돈과 타이틀 이야기를 해 볼까요...
가장 중요한 이야기
한 시간의 미팅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제 직속 상사는 다음 미팅이 예정되어 있다며 나가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연봉과 직급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 상황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예정되어 있던 미팅 시간을 넘기고 나서야 CEO가 “자 이제 Package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라며 말을 꺼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아서 많은 것을 해줄 수는 없다”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저는 2년 근속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적절한 인상률을 적용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CEO는 그게 얼마냐고 물었고, 저는 5%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제 연봉 수준은 이미 낮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돈을 얼마나 더 받을 수 있을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원한 것은 감사와 인정이었습니다.
이전에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연봉 인상을 거절당했던 경험이 뼈아팠기에, 너무 높은 인상을 요구했다가 협상이 결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2년 동안 좋은 성과를 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제스처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업계의 평균 인상률보다는 낮은 수준인 5%를 제시했어요.
정말 허무하게도 CEO는 단번에 “I can give you that.”이라고 말했습니다. 반응을 보니 제 요구분은 그의 예상치를 크게 하회한 모양이었어요. 더 높게 불렀어도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는 충분히 이 결과에 만족했습니다. 또 1~2년 일한 후에 다시 인상을 해달라고 하면 되는 일입니다.
쉽지 않은 연봉 협상
저는 2년 전에 이 회사에 이직할 때에도 15%의 연봉 인상을 요구했고, 그 때도 CEO는 군말없이 한방에 “Okay”를 시전했습니다. 이번에도 5%의 인상이 너무나 쉽게 받아들여져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다녔습니다. 이 회사에서 연봉을 올려받는 건 이렇게 쉬운 일인가?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연봉 협상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여기서 연봉을 올리는 것은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곡예같았습니다.
사례 1: 1년 근속했으나 월급 인상분은 겨우 500 홍콩 달러 (약 8만 8천원)
사례 2: 1년 근속 후 리뷰를 할 때가 되었으나 CEO가 답을 주지 않으며 회피. 그렇게 4개월이 지났으나 여전히 리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사례 3: 연봉 인상 20%에 합의했으나, 앞으로 3개월은 10%만 올려주고, 4개월째 되는 달부터 20%를 올려주겠다고 통지. 4개월째 되는 월급 입금날 목이 빠지게 기다렸으나 약속했던 20%는 입금되지 않았고 그날로 사직서 제출.
이런 괴담을 워낙 많이 들었던 터라, 5월 초에 5% 인상을 받기로 구두로 협의한 후에도 저는 의심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5월 말, 월급 입금일을 앞두고도 저는 설마 인상분이 전액 입금될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놀랍게도 약속한대로 정확하게 5%가 인상된 금액이 5월 월급으로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습니다. CEO는 사람을 가려 가며 연봉을 올려주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성과가 그런저럭인 사원에게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회피하지만, 능력 있어 보이는 사원에게는 이의없이 연봉을 올려주는 듯 했습니다. 이렇게 CEO 마음대로 올려주는 시스템, 아니 시스템이라고도 하기 힘든 독재 체제에는 장점도 단점도 있었습니다.
장점은 일을 잘 하면 그만큼 보답을 받을 수 있으니 동기부여가 확실히 된다는 점이죠. 하지만 CEO는 실무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보니 그가 보기에 능력있어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별 일을 하지 않고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말도 안되는 승진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저는 몇 번이나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연봉을 올려받고 나니 신기하게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씻은듯이 사라지더군요. 지난 2년간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를 정말 못살게 굴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CEO에게 제대로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이야기
은행 앱을 열어 인상된 월급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면 좋아서 실실 웃음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직급 역시 올려받아야 했어요.
리뷰 시간에는 이 이야기의 끝을 맺지 못했습니다. 저는 2년간 UX Lead로 일했고 좋은 실적을 냈기 때문에, UX Director라는 타이틀을 원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쩐지 상사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습니다. 제 직속 상사는, “CEO와 상의해보고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믿고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감감무소식인 상태가 계속되자 저는 다시 제 직속 상사에게 제 타이틀에 대해서 의논해보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까먹고 있었다며 바로 CEO에게 달려갔다가, 저에게 돌아와 Okay라면서 UX Director 타이틀은 7월부터 적용될 거라고 했습니다.
기쁜 마음도 잠시, 팀원 중 한 명이 그만두는 마음에 저는 급하게 채용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채용하려는 사람의 이력이 상당히 길어, Senior UX Designer가 아닌 UX Lead 직급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고 권하자, 상사들이 “그럼 너는? 너랑 같은 직급인데?”라고 반응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이것들이 또 까먹은 것입니다…
전 진짜 인내심의 한계에 다달랐습니다.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승진같은 중대사를 그렇게 쉽게 까먹고, 한번이 아니라 두번 세번씩 까먹고, 3월부터 요구한 승진이 7월이 가까워질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자 정말 폭발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연봉과 승진 협상 전에 저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내심을 갖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까먹음을 당하자 참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여기까지 와서 난리를 피웠다가는 거의 다 얻어낸 승진을 다시 놓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정중하게, 하지만 짜증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한 번 UX Director 타이틀을 요구했습니다.
다시 한 번 상사들은 동의를 해 주었고, 지금껏 제대로 된 UX 팀을 갖춰 본 적이 없어 어떤 타이틀이 좋은지 사실 자기들도 혼란스러웠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습니다. 네, 제가 봐도 이곳에서 타이틀은 정말 주먹구구식으로 책정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남들이 제 말을 듣게 하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안그래도 몇 번씩 똑같은 말을 해야 해서 답답한데, 다섯 번 설명할 것을 세 번 정도로 줄이기 위해서라도 디렉터 타이틀은 꼭 필요했습니다.
클라이언트 중에서도 낮은 직급에게는 무례하지만 높은 직급에게는 공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타이틀이란 건 전쟁터같은 직장에서 나를 지켜주는 방패같은 아이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진짜인지, 제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소문이 어디론가 퍼져서 클라이언트에게 보낼 문서에 사람들이 저를 벌써 UX Director라고 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빨리 정식으로 적용받아 명함에도 새기고, 이메일에도 적어 넣고 싶어요. 아, 정말 너무 오래 기다려서, 진이 다 빠질 것 같네요. 그리고 절대 이걸 1년 주기로 반복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다시 2년 근속 해보고, 다시 승진 기회를 노려보도록 하겠습니다.e
이것으로 협상 이야기 실전편을 마칩니다! 재미와 도움을 줄 수 있는 시리즈였기를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