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이야기 실전편 (2) 준비와 면담
철저한 준비로 빠져나갈 길을 원천 봉쇄한 후 면담에 임했습니다.
지난 편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메일도 전략의 일부
이렇게 한 달 간 치밀하게 밑작업을 해온 저는 드디어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하고, CEO에게 퍼포먼스 리뷰를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먼저 제게 CEO가 제시했던 과제, “복잡하고 큰 규모의 UX 프로젝트를 더 많이 따내어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 회사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았으니 의논을 해 보고 싶다고 적었어요.
또 그를 위해서는 더 많은 결정권과 자율권이 필요하기 때문에 승진을 검토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적었습니다. 무작정 제 사정을 들이민 것이 아니라, 회사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저의 승진이 불가피하다는 식으로 논리를 구축한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재깍재깍 답장을 주던 CEO가 일주일이 지나도록 답장을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연봉 인상 요구와 리뷰, 또 실제로 오른 연봉이 적용되기까지, 보통 몇 달의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이미 사내에 유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지연 전술로 보였고,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인내심을 갖기로 다짐했습니다. 지금 당장 연봉 인상과 직급 조정이 시급한 것은 아니었기에, 시간을 들여서 몇 달이 걸리든 끈질기게 버티면서 들어줄 때까지 설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당분간 이직을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었어요.
이렇게 마음을 먹자 신기하게도 금방 답장이 왔습니다. 흔쾌히 제 요청을 받아들여 빠르게 리뷰를 설정하자는 내용이었어요. 일주일만에 답장이 와서 바로 리뷰를 설정하는 것은 사실 사내에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반응에 지난 2년의 노력과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리뷰에 앞서 성과를 정리하기
사회생활을 하며 사람들이 자주 하는 착각 중 하나가, 조용히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그 노력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각자 자기 일에 바빠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누가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식으로 팀에 공헌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이러한 경향은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심해집니다. 실무를 하지 않는 고위직이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파악하고 있지 않은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제가 이 회사에서 3개월간의 수습 기간을 마치고 평가를 받는 자리에서, 직속 상사가 이렇게 코멘트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난 3개월동안 두어개의 프로젝트를 핸들링한 걸 알고 있어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3개월동안 제가 해치운 프로젝트는 절대 두어개가 아니었거든요. 가볍게 7~8개는 되었습니다. 저는 제 성과가 이렇게까지 소통이 안 되고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지난 2년간의 성과를 정리했습니다.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제가 한 일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상사들의 기억을 소환해 오해의 여지를 원천봉쇄하고자 했습니다.
첫 장에는 제가 맡아서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프로젝트, 제가 경쟁 피티에 나가서 따온 프로젝트를 쭉 정리했습니다. 리스트를 만들어 놓으니 제가 각종 대형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이끌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다수의 프로젝트를 따와 회사의 이익 성장에 공헌했다는 것이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한 장의 슬라이드에는 프로젝트 이외에도 제가 사내에 문화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전에는 경시되기 일쑤였던 교육과 회고, 보고를 추진해 회사의 UX 성숙도를 높였고, 이 때문에 우리가 이제는 크고 복잡한 UX 프로젝트를 수주해 실행할 수 있는 홍콩에서 몇 안 되는 에이전시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 장에는 더 큰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UX가 아직도 자리잡지 못한 홍콩 땅에서 우리 회사가 이 분야의 탑 에이전시가 될 수 있다고 적고, 그를 위해서는 적절한 채용, 팀내 교육, 전략적 프로젝트 수주, UX 포트폴리오 빌딩, 업계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등의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제게 더 많은 권한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세 장의 슬라이드로 저의 승진이 불가피한 회사의 전략적 결정인 것처럼 그려냈습니다.
지연 전술을 담담하게 받아내기
면담 시간이 되어 저는 제 직속 상사를 끌고 회의실로 갔습니다. CEO는 한참을 늦장을 부리다가 10분은 늦게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저는 협상 프로세스 중에 지연 전술을 여러분 관찰했습니다. 제 팀원 중에 한 명 역시 비슷한 일을 겪었다며 불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측은 연봉 인상에 합의했으나, 일단 인상분의 50%만 3개월간 지급하고, 4개월째부터 100% 지급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4개월째 되는 날 월급이 입금되기만 목이 빠져라 기다렸지만 결국 다 받지 못했고, 다른 이유도 겹쳐 그자리에서 사직을 통보했습니다.
건너 건너 리뷰를 요청한 후 답장을 못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겨우겨우 답장을 받은 이후에도, 리뷰 면담 실시까지 몇 달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CEO는 면담 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평가를 다수 받아올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월급 인상 요구는 아무래도 사측에게 반가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대응에 늦장을 부리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뢰 역시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자산입니다. 이러한 불만이 쌓여 퇴사의 원인이 될 수도 있고, 이는 채용과 교육에 더 많은 비용을 소모하게 합니다.
저는 익히 사측의 지연 전술에 대해서 들어 알고 있었고, 또 여기서 짜증을 내서 일을 그르친다면 나만 손해를 본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도록 재차 마음을 가라앉혔습니다.
저는 급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시간은 제 편이었습니다.
회사의 기대치를 확인하기
직속 상사는 먼저 지난 2년간의 총평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홍콩에서 찾아보기 힘든 제대로 된 UX 업무를 맡아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이 분야에서 다른 어떤 사람의 견제도 당할 필요 없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5분여에 걸쳐 준비해 온 슬라이드를 가지고 제 성과를 어필했습니다.
CEO는 제게 바라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화이트보드에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열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정말 긴긴 시간동안 이야기했지만 핵심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계열사 안에서 존재감 드러내기
크고 복잡한 UX 프로젝트를 따내고 완수하기
콘텐츠, 전략과의 연계를 강화할 것
제가 입사하고 나서 당분간 CEO는 밥먹듯이 우리의 UX 레벨은 아직 1단계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저를 수준이 낮다며 비평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면담 자리에서, 이제 2단계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실무자 입장에서는 대체 뭘 가지고 그런 판단을 하는 건지 잘 감이 오진 않았지만, 하여튼 1단계에서 벗어나 2단계로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그리고 3단계로 가려면 콘텐츠와 전략에 더 힘을 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제 생각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견지였습니다.
최근 콘텐츠 헙을 만들고 싶다는 의뢰를 주는 클라이언트가 많았지만, 저희는 사내에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부문이나 인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자꾸 비공식적으로 글쓰기 의뢰가 들어왔어요.
저는 UX팀이 비공식적으로 글쓰기를 돕는 차원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제대로 된 인원을 갖추고 콘텐츠를 생산해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CEO도 크게 동의했습니다.
다음 편이 마지막 이야기가 되겠네요. 3편에서는 결국 가장 중요한 연봉 인상과 직급 조정은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