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트위터에서 오랫동안 글을 써 왔습니다. 가끔가다 생각없이 툭 던진 말이 예상 외로 많은 공감을 살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트위터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전에는 아래 글이 천 번이 넘게 공유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내 생각에 30까지는 진짜 우당탕쿠당탕이고 30-40에 겨우 어떻게 사는건지 감잡고 40 지나서 진짜 인생 시작인것같어
가볍게 쓴 글이기는 하지만 제가 힘든 20대를 보내고, 30대에 모색을 거듭하면서 겨우 40대에 들어 안정과 행복을 찾았기에, 실제 인생 경험에서 얻은 통찰을 압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공감을 살 수 있었던 건 아닌가 싶네요.
20대 중후반에 경험하는 “우당탕 쿠당탕”에는 “Quarter-life crisis”라는 명칭이 있습니다. 말그대로 인생을 4분의 1정도 살았을 때 맞이하게 되는 인생 위기를 뜻합니다. 한국에서는 “청년 위기”라고 번역되는 일도 있어요.
임상 심리학자 알렉스 포크의 정의에 의하면 이 쿼터라이프 크라이시스란 “커리어, 인간 관계, 경제적 상황을 둘러싼 불안정, 의심, 실망의 시기”라고 합니다. 그는 덧붙여 “청년기에 큰 변화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삶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어른이 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스트레스를 마주하는 시기”라고도 설명했습니다.
30세라는 데드라인
20대 중후반에는 30세 이전에 무엇이든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기 쉽습니다. 30세 이전에 이런 저런 것들을 완수하라며 독촉하거나 못박아 놓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30세가 마지막 보루처럼 느껴지며 자꾸만 마음이 급해집니다.
여성의 경우에 결혼과 출산의 압박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렵입니다. 지금은 20대에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는 비율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불과 10-20여년 전만 해도 30세를 결혼의 데드라인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아이를 갖고 싶다면 20대 중후반은 가족 계획을 그려보기 시작하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30대에도, 40대에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지만 그래도 임신과 출산은 젊은 편이 좋다고들 합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여성들은 마치 “생물학적 시계”가 딸깍딸깍 소리를 내면서 돌아가는 듯한 압박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미국 드라마 <프렌즈>에서는 레이첼이 30세를 맞이하고 결혼과 출산에 대한 계획을 털어놓으면서, 벌써 서른 살이 되어버린 상황에 압박감을 표현하는 씬이 있습니다.
난 35살이 되기 전까지 첫 아이를 갖고 싶어. 그럼 34살까지는 임신할 필요는 없지. 그렇다면 프라다가 임신복을 만들기 시작할 때까지 4년은 기다릴 수 있어! 아 잠깐만, 근데 임신하기 전에 결혼을 해야 하잖아…
그래, 그럼 33세까지 결혼하지 않아도 돼. 3년이나 있다고! 아 잠깐만, 난 결혼식을 계획하는 데 일 년 반은 필요해. 그리고 약혼하기 전에 1년 반은 사귀어봐야지. 그렇다는 건 30세에 미래의 신랑을 만나야 한다는 거야.
20대 중후반에는 이렇게 데드라인을 그려놓고, 시간을 역순으로 계산하면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보느라 머리가 바쁘게 돌아갑니다.
결혼과 출산 뿐이 아닙니다. 커리어 면에서도 30세쯤 되면 대단한 성취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누구는 승진을 했다고 하고, 누구는 집을 사고 차를 샀다고 합니다. 누구는 억대 연봉을 받는다고 하고, 누구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고 합니다.
30세라는 암묵적인 데드라인을 눈앞에 두고, 이상과 크게 동떨어진 현재 나의 모습을 보면 자꾸만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불안과 의심, 혼란과 자책은 커져 갑니다.
30세는 출발선에 불과하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선은 명확하지 않다. 사람들은 연속된 길 위를, 궤도를 걷는 것이다.
-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신경과학자 피터 존스
최근의 뇌과학 연구는 30세라는 데드라인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법과 의료를 비롯한 모든 사회 시스템이 20세 언저리를 성인으로, 30세부터는 완성된 어른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사실 인간의 뇌는 30년이 넘게 변화를 거듭하며 사회적인 통념과는 사뭇 다른 발달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전성기가 20대, 30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30세라는 나이는 출발선에 불과합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뇌과학 뿐만이 아닙니다. 교육 과정 역시 이십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불과 몇년만에 커리어에서 엄청난 성취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경제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산 축적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서른 이전에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억대의 노후자금까지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쿼터라이프 크라이시스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이렇게 현실을 직시하고, 서른 이전에 엄청난 성취를 거두거나, 인생을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게임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쿼터라이프 크라이시스를 극복하는 방법
혼돈의 20대 중후반을 보내며 자기 파괴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 역시 20대 후반에 조급한 마음, 괴로운 직장 생활, 실패한 연애, 통제할 수 없는 인생에 답답함을 느끼고 자책을 거듭하며 심한 번아웃과 우울증, 섭식 장애를 경험했습니다.
불운하게도 주위의 모두가 결혼해라, 승진해라, 돈을 벌어라, 라며 제 등을 떠밀 뿐, 누구도 현명한 조언을 던져주지 않았습니다.
쿼터라이프 크라이시스는 피해갈 수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누구나가 겪어야 하는 성장통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몇 가지 조언이, 이 통과 의례를 가벼운 방황과 고민으로 끝마칠수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1. 주위의 소음을 끄고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생각해보기
이 시기에 찾아오는 허무함은 그동안 남들이 하라는 걸 다 했는데도 도무지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밀려드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고, 시키는 대로 스펙 관리를 해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후회가 찾아옵니다.
남들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산 인생이 될 수 있을지는,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가능합니다. 남들의 이래라 저래라에 그만 휘둘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색하기 시작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2. 인생을 긴 지평선으로 바라보기
서른 살까지 해치워야 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세상 대부분의 일은 간절히 원하며 오랜 시간 꾸준히 임하면 달성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에는 반드시 ‘시간’이라는 귀중한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커리어의 빛나는 성취, 가능합니다. 하지만 2, 3년 내에 해치우려 드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10년, 20년 후에 어떤 결과를 이룰 수 있을지 생각해보세요.
반짝 오른 비트코인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20년간 꾸준히 저축하고 투자한다면 경제적 자유를 손에 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롤모델을 찾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자신보다 10살, 20살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잘 관찰해 보세요. 지나친 자아 의탁만 하지 않는다면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은 인생의 장기 목표를 세울 때에 좋은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습니다.
3.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기
인생이 엉망진창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해봅시다. 그 문제 하나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많은 것들이 연쇄적으로 좋아질 수 있습니다.
커리어와 건강, 돈, 인간 관계같은 어렵고 복잡한 문제는 해결에 몇 년 이상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끈기를 가지고 한 번에 한 가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집중하세요. 마음을 짓누르는 가장 무거운 돌에서 해방된다면 그만큼 삶은 가벼워질 것입니다.
4. 이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을 인식하기
인생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땐 이 혼란과 아픔이 영원할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무척이나 길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처럼 깜깜하게 느껴져도 언젠가는 빛이 드는 반대쪽 끝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괜히 30세가 넘으면, 40세가 넘으면 인생이 더 좋아진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커리어와 수입이 안정되고, 남의 목소리에 덜 흔들리게 되면 인생을 더욱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여유도 생깁니다. 거짓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는 ‘행복 지수’와 같은 통계에도 드러나는 사실입니다.
・・・
20대 중후반에는 제 자신의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아프고 난 후에야, 인생을 조금씩 뜯어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엔지니어에서 디자이너로 직종을 바꿨고, 보수적인 대기업과 몰락하는 제조업을 떠났으며, 답답한 일본 사회를 떠나 홍콩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이직을 거듭하며 연봉을 올렸고, 더이상 미래가 두렵지 않을 정도의 자산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저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 낳고 집과 차를 가져야 한다며 무척 조급해했지만 끝내 '정상 가족’에 대한 압박을 버렸습니다. 나 자신과 천천히 대화하다 보니, 결혼과 출산, 육아, 이 모든 것이 결국 사회가 제게 주입했던 의무였을 뿐, 제가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혼자만의 시간을 사치스러울 정도로 즐기며, 사색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멈추지 마세요. 이렇게 자신을 끊임없이 탐색하며,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된다면, 쿼터라이프 크라이시스 뿐 아니라 어떤 인생의 위기에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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