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람들은 25세쯤에 일을 시작해서 65세쯤에 은퇴를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일을 늦게 시작하거나 일찍 은퇴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40년 동안은 일을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도 20세 초반에 일을 시작해 20여 년이 지났다. 길고 긴 여정의 중반에 이른 것이다. 사회초년생으로 일을 시작해, 중견 사회인이 되고 여러 번의 이직을 거치며, 또 이민을 하고 커리어를 확장하면서 20년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어리버리 신입 시절
평생 고용의 전통이 남아있던 일본 대기업에 입사한 터라 처음 일 년은 연수를 받으러 다니느라 바빴다. 처음 세 달간은 학교나 다름이 없었다. 교실에 앉아 사업 개요와 비즈니스 매너 등을 배웠고 이후에도 실제 일이 아닌 개인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날씨가 선선해지자 두 달간의 판매 연수와 또 두 달간의 공장 연수가 이어졌다.
TV를 제어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부서에 배속되어 조금씩 일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하지만 학계와 다르게 실제로 무언가를 만들어서 대중에게 판매하고, 수익을 창출해서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보람을 느꼈다. 양판점에 가면 우리 팀이 만든 TV가 진열되어 있었고, 거리엔 우리가 만든 제품의 광고가 걸려 있어 기분이 좋았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 내 통장 잔고는 달랑 이만 원이었다. 많지 않은 월급이었지만 이 돈으로 이제 내가 사고 싶은 것도 사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조금씩 여행도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날아갈 듯 기뻤다. 생애 처음으로 손에 넣은 경제적 안정에 마음이 놓였고 직장 생활이 이런 거라면 평생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의 3년 차: 권태와 우울이 찾아오다
이곳이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던 것인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3년 차에 접어들자 매년 반복되는 일이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TV의 신모델을 만드는 일은 디바이스 업그레이드를 제외하면 별다를 것이 없었다. 똑같은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똑같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의 연속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사내 곳곳에 만연한 엘리트주의가 불편했다. 80년대, 90년대에 눈부신 성공을 거둔 회사답게 윗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우리가 이 영광을 다시 한번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애플, 구글, 삼성 등의 회사의 부상에 발맞추지 못했고 다들 열등감에 찌들어 있었다.
나 역시 패배주의에 잠식되어 있었다. 하루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가능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위를 살펴보면 적극적으로 공부하고 준비해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거나 결혼해서 일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중도포기자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10년 차 전후: 방황하며 내 길을 찾다
3년 차에 시작된 슬럼프는 8년 차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업무 외적인 부분에서도 성희롱과 사내 괴롭힘, 여성 차별, 외국인 차별 등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우울증을 앓고 있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앞날이 막막했지만, 일단 회사를 그만두고 잠시 쉬기로 했다.
처음 시도하는 이직은 쉽지 않았다. 이력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자기소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느 직종에 지원을 해야 하는지 면접에서는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 닥치는 대로 서류를 넣었고 수십 개가 넘는 회사에 찾아가고 탈락을 하고 합격을 하면서 마치 서퍼처럼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스타트업, 중소기업, IT 대기업, 부티끄 에이전시, 글로벌 에이전시 등등 다양한 회사에서 일을 해 볼 수 있었고 많은 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배울 수 있었다. 맞지 않는 첫 회사에서 너무 오래 버텨 몸과 마음을 상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나는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면 재빨리 탈출했다.
이력서의 ‘경력’ 란이 부쩍 길어진 이 시기의 방황 덕분에 나 자신에 대한 많은 발견을 할 수 있었다. 또 문제 해결에 박차를 가한 시기이기도 했다. 저물어가는 제조업을 떠날 수 있었고, 맞지 않는 옷 같았던 개발직을 벗어버리고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으며, 일본을 떠나 홍콩에 정착할 수 있었다.
방황에도 때가 있다
10년 차 즈음까지는 이직이 너무나 쉬웠다. 그래서 많은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가능했다. 잡마켓이 얼어붙었다고 하는 지금도 3년에서 7년 차 정도의 중견들은 쉽게 새로운 일을 찾고 또 이직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경력이 길어지자 상황은 또 변화했다.
최근에 몇 번인가 이직을 시도했지만 중견 시절과 비교하면 난이도가 급상승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구인 자체가 많지 않았다. 소수의 리더와 다수의 실무자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조직의 구조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또한 경력을 쌓으며 연봉을 착실히 올려왔기에 현재는 신입이나 중견 시절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보수를 받고 있다. 회사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채용에 필요한 예산이 두 배, 세 배가 든다는 이야기이다. 가볍게 채용을 할 수도 없을뿐더러, 한다고 하더라도 검증에 검증을 거듭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의 방황의 시기는 끝을 맺게 되었다. 잦은 이직은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단점 역시 많다. 지나칠 경우 시도 때도 없이 옮겨 다니는 ‘잡 호퍼’라는 인상을 남기게 된다. 서류 준비를 하고 면접에 불려다니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모든 업무 성과가 단기에 그치기 때문에 진득하게 뿌리를 내리고 결실을 맺는 것을 볼 수도 없다. 또한 직장에서 좋은 평판을 일구고 자산이 증식할 수 있도록 시간이라는 거름을 뿌릴 수도 없다. 방황의 시기를 거쳐 안정의 시기로 나아가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흐름이었다.
15년 차 이후: 안정과 확장을 추구하다
10년 차 즈음까지는 전문 분야를 깊게 파고들어 가는 데에 주력했다. 리서치를 통해서 인사이트를 만들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프로덕트를 개발해 유의미한 비즈니스 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결과 많은 곳에서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제안을 받을 수 있었고, 작은 스타트업을 크게 키울 수 있었으며, 다양한 클라이언트와 협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차가 15년이 넘어가자 전문성만으로는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일을 잘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팀을 꾸리고 관리하며 더 큰 성과를 가져오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관리직에 도전했고 지금은 채용부터 시작해 팀원들의 리소스 관리와 커리어 지원까지 전반적인 리더 업무를 고루고루 수행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미 내 나이 또래는 많지 않다. 다들 어디로 갔는지, 창업을 했는지 은퇴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IT업계에서 이렇게 긴 시간을 버틴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시니어의 수요는 많지 않지만, 전문성과 리더십을 함께 갖춘 인재 또한 희소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한계 역시 느끼고 있다. 다양한 규모와 업계의 클라이언트의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어 크게 질리는 일은 없지만, 하는 일은 결국 비슷한 일의 반복이다. 일이 싫지는 않지만, 이 일만 계속하면서 앞으로 20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무언가 또 변화를 주어야 하는 시점이다.
그래서 글쓰기와 출판에도 도전해 보았고, 교단에도 서 보았다. 안정된 커리어를 토대로 가지를 뻗어나가며 확장을 꾀할 수 있었고 같은 일이라도 다양한 관점에서 다시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정말 많은 경험을 했고 또 이룬 것도 많은 것 같지만 아직 반밖에 오지 못했다. 앞으로의 20년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이 많아진다. 새로운 일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성장을 멈추지 않는 후반전이 되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일을 통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가고 싶다.
멤버를 위한 쿠키🍪
Keep reading with a 7-day free trial
Subscribe to 커리어에 진심인 여성들을 위하여 to keep reading this post and get 7 days of free access to the full post archives.